마음, 의식, 운명에 대한 공부-2005. 7월 석가사 정기법회 법어 홈지기 2005.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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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한 공부를 한번 해 보겠습니다.
오늘 공부는 마음, 의식, 운명입니다. 우선 운명에 대해 간단하게 공부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운명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없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결혼한 여자가 남편에게 어느 날은 불만이 잔뜩 있고, 또 어떤 날은 불만이 하나도 없다면 그것은 그 여자의 운명입니까, 선택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 되는 것은 내가 성질을 낼 것인가 안 낼 것인가 하는 것은 자기 의사의 행위입니다.

감정이 일어나게 되어 있으면 생겨날 것이고, 만일 지혜가 있는 남자의 아내가 그 남편에게 “너 만나서 못 살겠고 너 만나서 불행하고 지긋지긋해서 더 이상 못 살겠다”라고 말하더라도 그 남편은 지혜로써 아내를 대할 것입니다.

100명이면 99명은 같이 들이 받고 화내고 싸우겠지만, 그 중 1명 또는
2명, 3명의 지혜로운 남자는 여자가 그렇게 심하게 나왔을 때,
부드러운 미소와 다정한 말 한마디로 상대를 대하게 됩니다.

이런 행위에 의해서 그대의 운명은 180도로 바뀌는 것입니다.
서로가 말조심을 해야 합니다. 남자는 무한한 지혜를 갖춰라, 여자는 지혜를 하나도 안 갖추겠다고 한다면 그것이 그대들의 운명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또 만일 남자가 그런 상황에서 부드럽게 “미안해, 사랑해”라고 말한다면 험악하던 상황은 바로 풀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대의
운명이 된다 이 말입니다. 바로 운명의 갈림길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의 감정, 생각, 나의 행위들이 쌓여서 업(業)이 되고, 운명이 되는 것입니다.
운명이라 하는 것은 여러 층이 있습니다. 한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나무도 잎이 있고 가지가 있고, 줄기가 있고 둥치가 있고,
뿌리가 있는 것처럼, 나의 운명이라는 것도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운명의 잎이라고 표현해본다면, 나의 감정, 생각, 표현, 행위가 쌓여서 운명의 잎이 됩니다.
운명이라는 것이 왜 자신 의식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가?

만약 내가 죽은 다음에 내 운명이 어딘가 따로 움직여가고, 저 나뭇가지 끝으로 날아가야 한다면, 나뭇가지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것인가?
여기 ‘나’라 하는 것이 있어서 내 마음이 빠져 버리면 내 운명이 저 산마루 산꼭대기 끝에 가서 매달려 있을 것인가, 나뭇가지 끝으로 가서
매달릴 것인가..

마음이 빠지면 내 운명이 나갔다가, 마음이 돌아오면 나뭇가지 끝에 있던 내 운명이 돌아올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내 마음이 사라지면 운명도 사라지고 내 마음이 돌아오면 운명도 다시 나타난다. 결국 살아 있는 생존의 인연모습이니까, 결국 내 운명이란 것은 반드시 내 마음 따라 나타나고 마음을 따라 사라집니다.

사람의 운명이란 마음을 따라 나타나고 마음을 따라 사라진다.
그 속에 심오한 이치가 있습니다. 운명이라는 것은 결국 그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과나무가 있습니다. 따서 먹을 것이냐 말 것이냐는 것은 결국 내가 결정한다. 사과를 따 먹을 거냐 말 거냐 하는 것은
내 마음의 의사인 것입니다.

현재의 지금 내 모습, 잘 살고 못 사는 것 , 성공하고 성공 못하는 것, 시험에 들고 안 들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이 점점 내 마음에 쌓여져 있는 내용들이 나타나는 것이요 더 깊이는 나의 잠재의식이 내 운명의 중요한 부분을 결정합니다.

그 다음 나의 무의식이 내 운명에 중요한 부분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 속의 우주의식, 불교에서는 그것을 ‘아라야식
(阿賴耶識, alayavijnana)’이라고 합니다.

아라야식에는 세 개의 의식이 들어 있는데, 아라야식 윗부분은 우주의식 또는 신성(神性)이라고도 합니다. 가운데 부분은 함장식(含藏識)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부분은 비상비비상처식(非想非非想處識)입니다.

업(業)의 영원성을 뜻하며, 업의 영원성을 나타냅니다. 간단하게 얘기해서 아라야식 (우주의식, 함장식, 비상비비상처식을 말한다)이라고 말합니다.
내 운명은 내 마음속의 의식, 잠재의식, 무의식, 우주의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왜 마지막에 우주의식이 들어가느냐 하면, 내가 태어나는 출생,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어느 정도 그 수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때까지 산다, 그때 반드시 죽는다 그런 것보다도 죽음의 한계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업(業)에 대한 설명입니다.
우리가 ‘업(業)’이라고 말하는 것도 숙명업(宿命業), 전부정업(前不定業), 후부정업(後不定業), 의식업(意識業)의 네 가지로 편의상 나누어 말할 수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숙업(숙명업)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네 가지 피할 수 없는 것으로써 태어나는 것, 늙는 것,
병드는 것, 죽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말합니다.

생노병사는 집착을 일으키는 자에게 물체에 따르는 그림자와 같아서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라야식에서 나오는 우리의 업(業)입니다.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업(業)입니다.

다음은 부정업(不定業)이라고 해서 반드시 결정 된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부정업에도 전부정업과 후부정업이 있는데, 전부정업이란 거의 피하기가 어려운 것, 그러나 어쩌면 피할 수도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태어나면서 고아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도 전부정업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하면 부모와 살면서
자꾸 상극을 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모를 증오하고 미워하면서
부모 없이 살면 좋겠다는 등의 마음의 행위가 쌓여서 이런 결과가 생깁니다.

다른 많은 예들이 있지만 시간이 없으니 간단하게 말해 대개 나의 몸이 생긴 모습, 그리고 부모 자식과의 인연, 태어나면서 흉한 얼굴로 태어나는 등을 말하는데 부정업이란 고정이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운명은 고정이 되지 않았다,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후부정업이란 변화의 가능성을 나타냅니다.
피하기가 거의 어려우나 보다 많이 피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잘 사는가 못사는가, 성공 하는가 성공 못 하는가, 부부
자식, 형제 등 중생간의 인연 등을 말합니다.

그리고 의식업이란 현재에 있어서 의식으로부터 반연하는 업을
의식업이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가 마음속에 더 진실한 행복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의 소식이란 참으로 기기묘묘한 소식입니다.

사람의 의식은 이것이다 저것이다라는 분별, 싫다 좋다라는 판단,
일체 기억작용을 말합니다.

그리고 잠재의식이란 의식의 뿌리 역할을 하며 판단에 있어서 많은 영향을 줍니다.
무의식이란 마치 저 대지와 같아서 잠재의식이 지탱 하는데 있어서
밝고 어둠의 작용을 해 줍니다.

그렇다면 마음 하고 의식은 또 어떻게 다른가 우리가 생각할 때 의식이 마음이라 하지만 전혀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의식이 아닙니다. 잠재의식도 무의식도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각성의 빛, 각성작용, 그것이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첫째는 불성에서 나왔고, 그 다음 아라야식을
거쳐서 전말라식인 무의식을 거쳐서 후말라식 잠재의식을 거쳐서
의식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각성작용입니다.

의식하고 운명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식은 의식업이 되며, 바로 운명에 영향을 줍니다. 의식의 모든 것은 운명에 그대로 반연됩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의식이 포용되어져 있으나, 또한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각성의 빛입니다.
의식의 모든 것은 운명에 반연합니다. 자기 건강, 삶의 운명에 반연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은 무엇인가, 마음 각성의 빛은 무엇인가?

겨자씨만한 행복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각성의 빛, 행복의 빛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각성의 빛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며, 무한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의식작용만 있고 마음 작용이 없으면 어둡고, 우치(愚癡) 속으로만 들어갑니다.

각성의 빛은 무한한 것입니다.
늘 반성하고 염불하고 기도하고, 공덕을 닦고 이런 것들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불교에 “죽영소계진부동(竹影掃階塵不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나무 그림자가 뜨락을 쓸어도 티끌은 움직이지 아니하고’라는 뜻인데, 그 글자를 보는 것은 의식의 작용이다. 뜻을 생각하는 것은 의식의 작용입니다. 대나무 그림자라는 것은 인생살이 입니다.

사람 사람의 일이고, 내 자식과 나와 일이며, 남편과 나와 일이며, 내 몸이 겪는 일이고, 내 마음이 겪는 모든 것이구나 하고 깨우칩니다. 그것이 마음작용이다 이 말입니다.

마음 작용의 특징은 세 가집니다.

첫째는 괴로움을 없애는 것, 이것은 적멸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괴로움을 끊는다, 즉 각성(覺性)의 특징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특징은 가장 깨끗하고 편안하고 안온한 마음, 즉 공(空)의 특징입니다.

이런 마음을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마음이라는 것은 의식 작용이 아닙니다.
허공이 있는 작용, 구름 작용 비, 바람, 공기, 번개 이런 모든 작용은
의식작용에 비유될 수 있으며, 허공처럼 보이나 허공 같은 작용이
아닌 당체 작용은 마음작용입니다.

마음이란 내 마음이 행복한 것, 이것이 마음입니다.
내 마음이 괴로움이 없고 행복한 것, 그러면 의식 작용만 있고 마음이 없는 사람은 그만큼 고(苦)와 불안에 가까운 것입니다.

행복을 깊이 느끼는 사람, 행복을 깊이 각성하는 사람, 언제든지 마음의 작용이 더 많아야 합니다.

돈이 다른 남보다는 더 많았으면, 하는 것은 인간의 꿈입니다.
그러나 돈이 많은 사람들은 그만큼 더 복잡하고 더 괴로운 것입니다.
괴로움 속을 달려 들어가는 것은 탐욕입니다.

그리고 툭하면 짜증내고, 툭하면 성질내고, 불평하고, 이러한 부정적인 모든 작용은 다 분노입니다.

남을 반성 시키는 것은 누구나, 누구에게나, 쉽지 않습니다. 자신이 먼저 반성을 열어 보이고 타인의 반성을 유도해야 합니다.

사람이 늘 자기 생각을 자신의 업으로 삼아서 괴로움 속으로 달려 들어갑니다. 남보다 더 많은 탐욕, 성냄, 우치심(고집) 이 세 가지가 자신을 오로지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얻어야 하는 것은 억만장자의 부(富)보다 겨자씨 하나만한 행복, 마음 가운데 진실한 행복이 소중한 것입니다. 이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늘 부처님 경전을 읽고, 열심히 기도하고 반야심경을 읽고 내 모든 의식 작용이 운명에 다 반연하는 것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잘 알아서
내 마음의 각성을 닦아야 합니다.

우리가 각성을 닦기에 가장 좋은 뜻으로 불교에서 가르치는 ‘여시여시(如是如是)’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가장 괴롭고 힘든 이 순간, 돌아보면 나는 이미 부처님을 만났고 나는 이미 위없는 법문을 듣고 있고 나는 이미 기도를 하고 있고 나는 이미 부처님께 완전히 귀의하고 의지하였나이다. 하는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가장 괴롭고 힘든 이 순간이 행복하다, 지금 현재가 가장 행복하다 여기서 겨자씨만한 행복이 생기는 지혜의 시작입니다.

‘지금이 최상이다.’라고 자기가 자각 할 때, 여기서 겨자씨만한 행복이 열리는 것이요 이것이 우리 마음의 각성의 길입니다.

반야심경에 보면 끝 구절에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
주(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래 이 구절은 ‘이시대신주(以是大神呪)’입니다.
이 뜻은 지금 이 마음이 가장 행복하다 라고 깨닫는 것이 ‘이시대신주’입니다. 이시대명주(以是大明呪)라, 지금 현재의 이 마음이 최고다
이것이 가장 밝은 진리의 도리입니다.

다음 ‘이시무등등주(以是無等等呪)’ 이 마음보다 더 좋은 것은 세상에 존재 하지 않는다. 이보다 더 등등한 것은 없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설령 수천억원을 가지게 된다 하더라도 마음이 특별히 더 밝아지겠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수천억을 가진다고 밝아지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수천년 전부터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해 오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기도하고 마음에 밝음을 닦으면 밝음에 의하여
전부정업의 자리가 저절로 밝아집니다. 전부정업은 전생에서 결정되고 이생에서 결정되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후부정업은 주로 이생의 업작용에 의해서, 공덕력에 의해서 결정되지만 전부정업이란 전생과 이생에서 결정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예전에 절에 사는 남자 행자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열이 나기 시작하는 열병이 들었습니다.
옛날에는 열병이 돌면 다 죽는 걸로 알았습니다. 그때 도 있는 스님이 보니 15살이라 금년 8월에 아이의 운명이 끝나는 것을 보시고 “어쩔 수 없구나, 아이의 정업(定業)이 15살 되는 해 8월 말로 생명이 끝나 죽게 되겠구나.”

할 수 없이 죽을 땐 부모 곁에서라도 죽으라고 부모 곁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부모 곁에 갔다가 8월말이 끝나고 9월 달에 다시 절로 돌아왔습니다. 이런 일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스님이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어 보았더니 아이가 별다른 기억이 없었습니다.

스님이 눈을 감고 잠시 살펴보니, 아이가 집으로 내려가다가 장마가 져서 흙물이 밀려 내려오는데, 한편에서 엄청난 개미 떼가 시커멓게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아이는 곁에 있던 나무 가지를 잘라 개미에게 대어주니 개미가 그 나뭇가지를 타고 기어 나와 살아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개미의 생명을 살려준 인연공덕력으로 그 아이는 살아난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운명이란 결정적인 것은 없습니다. 변화를 합니다. 대체로 부정업의 특징은 결정 되어진 바가 없다. 마음 작용에 의해서 인연을 따라 다시 변합니다. 그런 오묘한 이치를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를 이루고 있는 이치에 대해서 마음과 의식과 운명에 대해서 공부 했고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탐욕, 분노, 고집, 이 세 가지입니다.
고집이란 주로 내 생각입니다. 눈에 보이는 고집과 보이지 않는 고집이 있는데 내 생각이란 다 고집에 들어갑니다.

나를 지배하고 있는 주축은 탐욕과 성냄, 성냄은 주로 그 뿌리가 슬픔입니다. 다음은 고집, 내 생각 이것이 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속에서 우리가 찾아야 되는 것은 마음작용, 각성입니다.

각성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인연은 첫째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자각, 그리고 두 번째는 지금 이 순간의 인연이 가장 행복하다는 자각, 마지막 세 번째는 지금 이 순간의 이 마음이 가장 행복하다는 자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마음 도리를 공부했습니다.

죽영소계진부동(竹影掃階塵不動)이요

대나무 그림자가 내 마음 속을 쓸어도 내 마음의 괴로움은 일어나지 아니하고 세상살이에 고통스러운 일들이 내 마음을 후비고, 할퀴고, 쓸어대도 마음에 본성을 해치는 괴로움의 티끌은 일어나지 아니합니다. 이것이 마음의 도리입니다.

더운 여름이지만 더위를 이겨 내기 위해서는 반야심경을 눈 감고 한편 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반야심경을 염염불리(念念不離)로 열심히 하면 마음속에 반야의 위대한 빛이 나타납니다. 마음을 각성하는 길입니다.

즉심시불(卽心是佛) 이대로 부처님의 마음 도리로 돌아갑니다. 부처의 빛 속으로 돌아갑니다. 최고의 성취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임희숙 : 좋은 법문 감사합니다 _()_ [2011-11-11 22:11:50]
김 준 택 : 운명은 결정적 이지않다는 큰스님의 법문이 마음에 와닫습니다 [2005-09-04 16:09:23]
원각심 : 큰스님 법문은 어느때 들어도 잔잔한 감동과 반성을 하게 됩니다. 평범힌 법문속에 깨달음의 지혜를 얻을 수 있어 항상 감사드립니다. 행으로 실천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05-08-20 19:08:50]
우창현 :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장시간의 공덕을 드려 큰스님의 묘법을 올려주신 분께 다시한번 감사드리고,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2005-08-18 10:08:41]
우창현 : 감사감사합니다.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닌 것이 마음인가? 그것이 의식이 되고 行이되어 모이고 모여서 운명이 되는 것인가요? 콩는 콩이고, 팥은팥이지요. 오늘은 마음과 의식과 운명을 생각(?)해보렵니다. [2005-08-18 09: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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