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참 수행에 대하여 돌도사 2009.08.24
첨부화일 : 없음
우리 불교의 목적이 무엇인가? 生死苦海를 벗어나 저 언덕의 常樂我淨인 열반을 얻는 것이다.常은 곧 생멸변천이 없는 것,樂은 苦를여이어 한없는 즐거움만 받는 곳,我는 곧 妄我를 여이고 眞我인, 곧 眞如자체를 말 하는 것이다.淨은 모든 번뇌를 떠난 자리를 말 하는 것이니 곧 열반의 4가지 덕을 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고해의 해탈과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 수행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속적인 인격수양의 아닌 진정한 불교의 수행은 자신의 진여자성이 본래 불생불멸인 것을 관찰해 보는 것이다.
<기신론>의 <수행신심분>에 수행하기 위해서 5가지 門이 있는데 施門,戒門,忍門,進門,止觀문이 있다고 했다. 곧 6바라밀을 말 하는 것이다.6바라밀은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를 말한다, 곧 止는 禪定을 말하고, 觀은 智慧를 말한다. <기신론>에서는 6바라밀을 왜 줄여서 5門이라고 했을까? 止와 觀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觀하면서 止가 되는 것이고 止가 있어야 觀이 되는 것이다. 육조혜능도 定과 彗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定慧雙修를 말 한바 있다. 아래 기신론에도 쌍으로 수습한다 했다.

<기신론>
“어떻게 止觀門을 修行하는가? 止라는 것은 모든 境界相을 그치게 함을 말하는 것이니 사마타관<奢摩他觀>을 隨順하는 뜻이기 때문이요,觀이라고 하는 것은 因緣生滅相을 분별함을 말하는 것이니 비바사나<毗鉢舍那>觀을 隨順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수순하는가? 이두가지 뜻으로 점점 修習하여 쌍으로 눈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경>에 사마타에 이어서 비파사나를 닦거나 비파사나에서 이어서 사마타를 닦거나, 두 가지를 병행하여 닦으면 이 세가지 수행 가운데 모두 道가 생겨나며 그 道를 따르고 증장시켜 풍부히 하면 곧 모든 속박이 끊어지며 잠재된 번뇌가 다 소멸된다.” 고 말 했다.여기에 의하면, 수행 가운데는 사마타와 비파사나라는 각각의 다른 특성의 두 방법이 있지만 행함에는 둘의 전후가 정해져 있지 않다. 이처럼 止와 觀을 행함에 선후가 없지만,<아함경>에서는 반드시 이 두 가지 행을 均等히 닦아야만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게 된다고 강조한다.“


<위에 <사마타>는 인도 말이니 한문으로 번역하면 止,止息,寂靜,이라 번역하며, 맘 가운데 일어나는 妄念을 쉬고 마음을 한 곳에 머무는 것을 말 한다. 곧 定이라고도 할 수 있다. <비바사나>는 한자로 번역하면 能見,正見,觀察,觀이라 번역하니 자세히 관찰하여 잘못됨이 없게 하는 것. 禪定에 들어서 지혜로서 상대되는 경계를 자세히 식별하는 것이라고 한다. 곧 지혜를 말 하는 것이다.>
止는 우리들 번뇌인 無明草를 손으로 잡는 것이요, 觀은 낫으로 무명초를 베는것과 같은것이다. 止는 心一境性으로 마음을 고요히 하는것, 觀은 지혜로 五蘊에 덮인 無明을 빛으로 비추어 제거하는 것이다.
觀은 반야인지혜를 말함이니 곧 불교에서 아주 강한 무기인 金鋼 에 비유된다. 금강으로 번뇌를 쳐부실 수 있기때문이다. 그래서 금강반야 바라밀이라고도 한다. 반야심경에 오온의 번뇌의적을 쳐부수고 6근과 6적의 도적을 쳐부수는 것이다. 四聖제와 8정도와 12인연은 觀으로 비춤은 止(정)인동시에 觀(반야)의 지혜로 관찰 해 보는 것이다.

<금강경>에 " 금강의 묘한 지혜는 견고함으로 다른사물에 꺾어지지 않고 날카롭기는 능히 중생들의 원결을 끊으니 , 반야의 웅대한 경전은 금강의 묘한 지혜가 드러나는 것이다.때문에 날카로움은 능히 중생들의 의심을 깨뜨리고 .견고하여 외도나 마구니들도 무느트릴 수없다."하였고, 또 금강의 견고함과 날카로움으로 아상과,인상의 대한 고집의 숲을 베어버리고, 지혜의 빛을 무명에 비추어 의혹의 안개를 三空에열어." 이상의 금강에 비유로 말한것이다.

天台智者大師도 모든 부처님의 팔만장경을 止와 觀의 두 뜻에 지나지 않는다. 고 하였으며, "무릇 열반의 참된 법에 들어가는데는 많은 길이 있지만, 그 가장 중요한 바를 논한다면 止와 觀의 두 법에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止야 말로 번뇌의 결박을 굴복시키는 첫 관문이고 , 觀 역시 미혹의 無明을 끊는 올바른 요인이며, 止는 心識을 愛養하는 좋은도움이 되고 觀은 神解를 策發하는 妙術이며,止는 禪定의 수승한 원인이 되고, 觀은 지혜의 由籍이 된다."고 했으며,<원효>도 기신론소에서 부처님 일대장교가 敎門이 많이 있지만 처음 수행에 들어감에는 두 門을 벗어 나지 아니하니, 眞如門에 의하여 止行을 닦고 生滅門에 의하여 觀行을 일으킴을 밝히는 것이다. 止行과 觀行을 쌍으로 부림에 萬行이 이에 갖추어져 있음으로,이 두 문에 들어가면 모든 문이 다 통하는 것이니, 이렇게 의심을 제거해야만 수행을 잘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기신론>에서 말한 5門의 앞에 보시, 지계. 인욕, 정진은 보조적인 수행이며 진정한 참 수행은 止와 觀일 뿐이라고 말 했다. 그리고 지자대사는 止觀을 수행함에 空, 假, 中을 말 하고 있다. 공은 나와 우주의 모든 물체는 실체가 없으며 비어 있다는 것이며, 잠시 인연 假和合으로 모인 물체들은 진실인 것처럼 보일 뿐 진실로 허망한 꿈과 같은 것이다. 中은 中道實體를 말 한다. 이렇게 空假中을 바르게 인식하고 그리고 관찰하며, 관찰로서 얻은 지혜로서 쉽게 止에 즉 定에 들 수 있는 것이다. 空假中을 <반야심경>에도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5蘊이 空함을 비추어 보시고 일체의 苦厄을 제도 하시다. 하는 것은 이런 거짓 인연으로 모인 것은 실체가 없으며, 나와 법이 空함을 관찰 하는 것이다.

“止 - 離欲 -禪定 -心解脫....情的
觀 -斷無明-智慧-慧解脫.....知的 을 말 하고 있다“

“止를 닦는 목적은 마음을 닦음이고, 마음을 닦는 목적은 탐욕을 끊음이다. 觀을 닦는 목적은 지혜를 닦는 것이고, 지혜를 닦는 목적은 무명을 끊으려 함이다. 탐욕에 물들면 마음이 해탈할 수 없고, 무명에 물들면 지혜를 닦을 수 없다. 탐욕을 여윔으로부터 마음의 해탈이 일어나고, 무명을 여윔으로부터 지혜의 해탈이 일어난다.
<대장경>

<기신론>
“만약 止를 닦는다면 고요한 곳에 머물러 단정히 앉아서 뜻을 바르게 하되, 數息觀이나 날숨,들숨에 등에 의지하지말며, 내지 形色이나 地,水,火,風등이나 見聞覺知에 의지하지 않아야한다”
원효는 소에 말하기를
“止觀을 닦기위해서는 다섯 가지가 갖추어져야 하는 것이다. 첫째는 고요한 곳에 閑居함이니 산림에 머무는 것을 말 한다. 만약 취락에 머물면 반드시 소란스러움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持戒가 깨끗함이니, 業障을 여읨을 말 하는 것이다. 만약 깨끗하지 못 하다면 반듯이 참회를 구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衣食이 구족함이요, 넷째는 선지식을 얻음이요, 다섯째는 반연하는 것을 쉬는 것이다. 다음은 원효가 결가부좌하여 좌선하는 법을 말하고 있다.<생략>

< 마하지관>에도 지관을 닦는 일에는 5연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첫째는 持戒, 둘째는 衣食具足, 셋째는 고요한 장소, 넷째는 주변잡무폐지, 다섯째는 선지식을 갖춤, 각 항목별로 왜 5연이 왜 필요한 것인지 설명 해 놓고 있다.

왜 날숨, 들숨, 數息觀을 하지 말라하는지 원효는 기신론을 소에

“만약 사람이 진여 삼매에 의하지 않고 다만 이러한 事三昧 만을 닦는 다면 들어가는 경계에 따라 취착을 여이지 못하는 것이며, 법<경계>을 취착하는 이는 반드시 나를 집착하기 때문에 三界에 속하여 외도와 더불어 같이 가게 된다. 이는 <지도론>에서 ”諸法實相 그 밖의 모든 것은 다 마구니 짓이다”라고 한 것과 같으니, 바로 이것을 말 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마하지관>에 止觀을 설명하고 있다.
“止는 ”息“의뜻, ”停”의뜻, “不止에 대함“이 止의 뜻이다. ”息“의 뜻이라는 것은, 모든 나쁜 覺觀(覺은사물을 推量, 즉 미루어 헤아리는 거칠은 마음의 작용이고,觀은 미세한 작용을 말하는데 모두 선정에 방해가 됨. 新譯으로 尋伺라 함)이나 망념의 생각과 상념을 寂靜하게 멈추거나 끊는 일이다.
유마경에 말 하였다.
“무엇을 攀緣이라고 하는가. 三界에 연 함을 말한다.”
이것은 破하는 대상에 붙여서 이름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 止의 息의 뜻이다.
“停”의 뜻이란, 마음이 진리의 이법에 연하여서 繫縛의 상념을 현전시켜서 정주한 채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인왕경>에서 말 하였다.
“이법에 들어간 반야를 이름하여 住라 한다.”
또 <대품경>에서 말 하였다. “주하지 않는 법으로써 반야 바라밀 속에 주한다.”
이것이 能止(모든 번뇌를 그치게 하는 일)에 붙여서 그 이름을 얻은 것이다. 즉 이것이 停止의 뜻인 것이다.<생략>

觀에도 역시 3가지 뜻이 있다. 貫穿(꿰뚫음)의 뜻과 觀達(관법의통달)의 뜻,불관에 관의 뜻이다.관천은 지혜의 예리한 작용은 번뇌를 꿰뚫고 멸한다는 뜻이다.<대경>에서 말 하였다.
“예리한 괭이로써 깎으니 큰 바위, 모래, 자갈에서 직접 금강석에 다다른다.”<법화경>에서 말 하였다.
“高原을 뚫고 파서, 또한 마른 땅을 보듯이 功을 베풀어서 그치지 않으면 드디어 점차로 진흙에 이른다.”
이것이 破하여지는 바에 붙여서 그 이름을 얻은 것으로 관천의 관을 건립한 것이다.
관달의 뜻이라는 것은 , 관하는 지혜가 통달되어 진여와 딱 맞아 떨어지는 일이다.<瑞應經>에서 말 하였다.
“마음을 그치고 마음의 근원에 도달하는 까닭에, 부르되 沙門이라 한다.” <대론>에서 말 하였다.
“청정한 마음이 상주하고 하나뿐이니, 바로 능히 반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能觀(관하는 주체)에 붙여서 이름을 얻은 것이다. ....이하생략.
“ 모든 다른 경전. 논전에서는 혹은 ”멀리 여의다“라고 이름하고, 혹은 ”주하지 않음”, “집착하지 않음” “무위“ ”적멸” “분별하지 않음” “禪定” “버림“ ”제거“ ”희사” 등으로 이름한다. 이것이 모두 止의 다른 이름들이다. “지견“ ”밝은識“”눈의 깨침“ ”지혜“ ”照了“(환히 비추어 나타냄) ”鑒達(비추어 통달함)“ 등등의 이름들은 일체 모두 觀의 다른 이름들이다. 반야는 이것이 하나의 불법이지만 부처님께서는 갖가지 이름을 설하셨고 해탈도 역시 그러하다. -이하생략-
또 止는 斷滅이니 단멸은 해탈과 통한다. 觀은 智慧니 지혜는 반야와 통한다. 지와 관이 같은 것을 이름하여 捨相(捨는 滅捨의 뜻으로서 일체의 번뇌나 분별을 모두 멸하여 버린 상을 이름)이라하지만, 사상은 바로 법신에 통한다. 이상에서 <마하지관>에 있는 글을 들 추어내보았다.
곧 <지>는 모든 탐진치 번뇌를 멈추어 끊고 <관>은 곧 지혜로서 마음이 본래 불생불멸하며 한 물건도 얻을 수 없는 본래 자심자리를 비추어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신론에는 말하고 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중생을 교화하여 十善을 행하게 한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한 번 식사하는 시간에 바로 이 법을 생각하는 것만 같지못하니, 앞의 공덕 보다 우월하여 그와 비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 하고 있다.

또 마음이 겁약해서 맘을 닦지 못하는 사람은 염불해서 극락세계에 가는 것도 말해 놓고 있다. 업장이 두터워서 참선수행을 못하는 사람은 부지런히 불전에 염불 참회하는 것도 말 해 놓고 있다. 아마도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과 팔만대장경의 수행하는 요지는 止觀이라는 두 글자뿐일 것이다. 요는 止를, 觀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수행하는 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보배 있는 곳을 아무리 말해야 行을 일으키지 않으면 뭣 할 것인가? 보배 있는 곳을 알지만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 거와같은 것이다.

*** 진정한 참 수행은 止, 觀 두 글자에 지나지 않을것이다. 천태 지자 대사는 불교의 모든 경전을 止, 觀으로 나눈 바 있다. 예로 능엄경은 止이며
금강경은 觀이며 하는 식으로 ...,**
이름 비밀번호
코멘트
이전글 : 노예신분상승(베르베르..,첨가)
다음글 : 또 다른 나